우울감과 자기 비하가 손잡고 찾아오는 날이 있다. 예를 들면 작년 말의 어느날처럼.
그날 잠을 제대로 못잔 채 겨우 일어난 게 시작이었을까 전날 물통이 새서 가방 속 물건들이 젖었다는 걸 발견한 게 시작이었을까 아침부터 날씨가 안좋은 게 시작이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중요한 건 아니다. 일단 출근할 때 마음이 눈에 젖은 바닥을 기어가는 마음이었던 건 확실하다. 사실 눈에 젖은 바닥을 기어가던 건 자동차지만 나까지 그런 것 같았다.
알다시피 이런 날은 되는 일이 없다.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열어보니 물방울들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물이 샜다면 노트만 젖진 않았을테니까. 뒷자리 다른 팀 사람들은 시덥잖은 이야기로 소음을 만들어낸다. 도저히 있을 기분이 아니라 조회 끝나고 바로 퇴근했다. 어디 갈 곳도 없어서 투썸에 갔었다. 케익을 먹으면 나아지겠지 그리 생각하면서. 씨발비용이다. 고민하다 좋아하는 몽블랑 케익을 주문했는데, 옆옆옆 테이블에 서로를 욕설로 불러대는 어린 커플이 앉는다.
나는 케익을 받자마자 자릴 옮긴다. 노이즈 캔슬링마저 뚫고 들어오는 그런 목소리라 더 싫어졌었다. 그런데 이런. 투썸이 CJ에게 버림받더니 케익 맛이 예전만하지 못하다. 이런 케익으론 기분이 나아지질 않는다. 중국어 과외를 미룬다. 글자를 아무리 봐도 언어로 읽히지 않는다. 읽는 순간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 결국 이런 기분으로 집에 가서 그냥… 잔다. 잘만 오던 잠도 바로 안와서 약을 먹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만 더 기다려볼걸 그랬다. 그럼 약 없이도 잠들었 거 같은데. 몇시간을 자고나서야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는 채 일어난다.
내게 낮잠은 죄책감을 수반하는 무언가다. 귀중한 시간을 폐기했다는 죄책감. 짜증에 방의 모습이 거슬린다. 울어버린 바닥과 물이 샌 자국이 선명한 벽지가 너무 싫다. 집주인이 붙여놓은 거대한 꽃무늬 스티커가 너무 싫다. 어떤 마음으로 저걸 붙였을까? 그게 마음이긴 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정리로 대응한다. 할 수 있는 한에서 뭐라도 해보잔 거지. 일단 책을 몇 권 버린다.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책상 배치를 바꿔보려 해보지만 그 구상마저 맘에 들지 않아 포기한다. 도저히 공간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걸로 살짝 나아졌다. 역시 사람은 버려고 살아야 한다. 난 너무 갖고 있으니까 가진 걸 치워내야 한다.
아니면 사실은 한숨 자고 나니 나아진걸까?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날은 그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