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사는 것

개혁주의 학교에서 배우고 개혁주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가끔, 아니 자주 마주하게 되는 모습들이 있다. 그건 바로 사람들이 과거에 살던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모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런데 어느 한 지점, 어느 생각들에 이르면 갑자기 16세기 사람처럼 사고한다. 게다가 조선인의 사고방식도 아닌 스코틀랜드인처럼 생각하는데 이쯤되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더 신기했던 건 이 모습을 보이는 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학부생 시절 스무한살 대학 2학년생과 이야기하면서 그에게서 나이 든 장로교도의 모습을 봤을 때 확실히 느꼈다. 단 세 살 차이였음에도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세기를 가로지르듯이 느껴졌었다. 또 이런 적도 있다. 한 20대 중반의 여성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직장과 이후의 커리어에 대해서 뜨겁고 확고하게 이야기하셨다. 직종만 조금 달랐다면 사업을 시작하셔도 괜찮아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는 결혼하면 그 모든 걸 그만두고 남편을 내조하며 살겠다했다. 여기까지야 자신이 그렇다는데 그렇구나 했었다.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런데 덧붙이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여자는 당연히 그래야죠.” 거기서 왜 하나님이 나오고 ’당연’이란 말이 나와야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요새 교회와 나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제일 크게 느끼는 부분이 이것이다. 왜 보수기독교인은 과거를 살아가는 것일까. 그냥 과거도 아닌 16-17세기 서유럽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다. 이것이 칼뱅의 제네바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보이기까지 하면 과한 걸까.

덧붙임. 그동안 교회와 나 사이에 놓여있는 문제들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해보았지만 내 분야의 지식은 물론이고 내 분야가 아닌 지식들까지 공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론을 내린 것은 많지가 않다. 안다, 이거 다 변명이다. 요즘에 든다는 위의 생각도 그렇다. 이 생각에서 더 나아가서 근대주의 이후 사조들에 대한 공포 같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원래 이런건 사석에서 안주거리 삼아 논할 이야기거리인 듯하다.

잘 살거다

난 이렇게 살거다.
내가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거고
가고 싶은 곳 가면서 살거다.
내가 보고 싶은거 보면서 살거고
읽고 싶은거 읽으며 살거다.
그렇게 정말 잘 살거다.

밀린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 책상도 정리했고, 한 달간 받은 편지들도 스캔해서 저장했고, 그동안 못 쓴 일기도 썼다.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정리하면서 더 해야할 것들과 줄여나가야 할 것들을 보았다. 머리 속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다.
— 꿈을 꿀 때마다 적어야겠다. 카프카가 꿈일기를 썼듯이 나도 기록해둬야겠다. 노트에 꿈일기라는 섹션을 만들었다.
— 머리 속에 생각나는 이야기의 장면장면을 글로 써보려했지만 도저히 풀어나갈 수 없었다. 공책에 대충이나마 그림을 그려 남겼다.
— 사진 몇 장을 광택지에 인쇄해봤다. 프린터 설정이 잘못돼있어서 비율도 사이즈도 이상하게 나와버렸다. 그래서 벽에 붙이지도 버리지도 못할 사진들을 갖게 되었다.
— 한 생명이 세상을 떠나는 걸 보았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모를 사람이지만 그 광경은 너무 이상했다.
— 하루 하루 노트에 적어둔 기도제목들을 고쳐가며 조금씩 구체화시키는 것이 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 매일 되뇌는 말이 있다. “여행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