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숨》

배명훈의 소설이다. 그의 작품과는 그간 맞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괜찮다 생각했다. 달 출신 무용가의 춤이나 후반의 그것은 읽으면서 여러번 감탄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인물들의 진실은 실망이었다. 높이 날아오르다가 넘어지고 만 무용수 같았다.

과학소설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이익은 저중력에서의 걷는 방식과 춤에 대한 묘사, 인류 거주지들간의 외교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인물의 이름들이 한국어여도 아무 상관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성에 대한 편견, 남학생이 여학생의 19배

코메디닷컴에 올라온 송영오 기자의 기사이다.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연구팀은 1700명의 생물학과 학부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가장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누구냐”고 물었다. 남학생들의 대부분은 더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이 있음에도 다른 남학생 가운데 한명을 가장 똑똑한 학생으로 지목했다. 남학생들은 이 남학생에게 4점 만점에 3점 이상을 부여했다.

남학생들은 3.0점을 받은 남학생과 3.75점을 받은 여학생의 능력이 동등하다고 인식하는 등 성 편견이 높게 나타났다. 반면에 여학생은 성 편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0.04점 정도로 다른 여학생에게 편향성을 보였을 뿐이다. 연구팀은 이러한 연구 분석을 통해 남학생의 성 편견이 여성보다 19배 이상 높다고 보았다.

성 편견은 단순히 사회 내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 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게 만들기도 한다. 남성들의 어처구니없는 인식들이 빨리 깨져야 한다.

그 버릇의 이름은 러시아

다들 사소한 버릇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것들이 있고, 또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즘들어 새삼 발견한 것이 있다. 이 버릇의 이름은 ‘러시안 워드’이다. 또는 ‘리멤버 예스 러시안’이다. 뭐, 방금 붙인 이름들이다.

이 버릇은 컴퓨터나 핸드폰에서 무언가 키워드를 쳐서 테스트를 해볼 때 드러난다. 예를 들면, 내가 무언가 프로그램을 짰다고 해보자. 이러저러하다고 입력하면 결과에 이러저러하다고 나와야 하는 프로그램을 방금 만든 것이다. 이제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봐야 할텐데 그때 치는 것이 바로 ‘러시아’다. 마치 ‘Hello, World!’ 같은 것이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때 나오는 상용구의 역할을 이 ‘러시아’가 담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버릇의 탄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을 갖게 됐는지는 대개의 버릇들처럼 알 수가 없다. 왜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 러시아라는 말 때문일까? 밝혀낼 수 없을 것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자꾸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는 건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는 중에 이 버릇을 더욱 의식하기 시작했으니 이젠 다른게 아닌 ‘러시아’만을 입력할 것이다. 북쪽의 러시아는 역사가 있지만 내 러시아는 그런게 없으니, 알아낼 수 없는 비밀을 찾아 점점 넓어지는 숲을 헤매는 꼴이다.

그나저나 버릇이란 말은 존재에 대한 말들 — 버릇이 있다, 버릇이 들다, 버릇을 떼다 — 은 있어도 버릇의 행동에 대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그 자체가 어떤 행동을 가르키기에 그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