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도 상미기한이 있다.

클래식이라 불릴지라도 시대와 맞지 않으면 별 수 없다. 어떤 책은 문장이 길목을 막고 어떤 작품은 사상이 발목을 잡는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었다. 60년 전 소설을 읽으며 한 쪽 한 쪽을 겨우겨우 나가고 있다가 현대 소설을 잠깐 펼쳐보니 말 그대로 물 흐르듯 넘어간다.

2016년 10월의 시청각

책보다 영화와 보낸 한달이었다. 노래도 별로 안듣고.

# 읽었다

달을 판 사나이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하인라인의 세계관 단편집. 연표를 보면 그의 세계관 타임라인의 초창기를 다루고 있다. 표제작 〈달을 판 사나이〉와 마지막 〈도로는 굴러가야만 한다〉 정도나 괜찮지 나머지는 자신의 설정놀이에 빠진거라 영.

# 보았다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6
보수 감독의 격조 있는 보수 영화. 정치색은 달라도 여전히 잘 만든 작품을 내주는 감독에게 감사하다.
분노 이상일, 2016
http://joseph101.com/2016/10/3802
아미르 나데리, 2016
이야기하는 바는 알지만 그 이야기에 너무 빠져들어버린 건 아닐까.
시네마 트래블러 셜리 아브라함, 아밋 마데시야, 2016
새로운 시대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 바꾸기 너무 어려운 사람, 다르게 바꾸어 가는 사람
루이 14세의 죽음 알베르 세라, 2016
난 정말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던 발견. 거의 모든 장면이 회화처럼 보이는 것도 맘에 들고. 죽어가는 루이 14세는 결국 관객을 얘기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든다.
물을 데우는 뜨거운 사랑 나카노 료타, 2016
정말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2016
http://joseph101.com/2016/10/3808
어라이벌 드니 빌뇌브, 2016
http://joseph101.com/2016/10/3810
신 고지라 안노 히데아키, 2016
http://joseph101.com/2016/10/3813
치하야후루 상편 코이즈미 노리히로, 2016
청춘 스포츠물은 그냥 스포츠물과는 다른 결을 가진 장르이며, 언제나 최고다.

〈신 고지라〉 (2016)

한가지 얘기하고 넘어가자. 국제 영화제에서 스타리움관에서 영화를 튼다고 하면 ‘그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보겠구나’하고 기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특히 이틀 전에 본 같은 스타리움관에서 〈루이 14세의 죽음〉을 봤으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 고지라〉는 그러지 않았다. 최고의 상영관을 두고 최악의 상영환경을 보여주었다. 상상해보자. 스타리움관의 중앙을 기준으로 절반 정도만 쓰는 영화를.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어 자막을 위해 그 절반의 스크린에 또 레터박스를 넣는다. 거대한 스크린을 두고 뭘 하는 것일까. 더 쓰다간 다시 화날 것 같다. 영화 이야기나 하자.

안노의 고지라다. 고지라는 미국산만 본게 전부라서 종주국의 고지라는 이게 처음이다. 하지만 미국과 다른 고지라를 보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일본 정부가 주인공이다.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관료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이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동일본대진재 때의 일본 정부를 알아야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정도다. 내내 펼쳐지는 회의와 화면을 가득 메우는 법조항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이게 뭐냐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컨테이전〉 같은 재난대처물을 좋아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희대의 재난을 — 이 경우는 고지라라고 하는 괴수 — 이겨내려는 이들을 보는 ‘재미’는 시대가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니 빨리 한국에 제대로 극장 개봉해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싶다. 상영환경 최악이었는데도 영화를 신나고 재밌게 봐서 열 받는단 말이야. IPTV로 직행한다면 일본에 가서 보지 못한 것을 분명 크게 후회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초대 고지라는 이번처럼 괴수화된 재난물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까지 듣고나니 2년 전 미국에서 만들어진 고지라가 왜 호평이었는지 알 것 같다. 고지라는 그냥 괴수가 아니라 재해여야 하니까.